일상이 된 괴롭힘

“과장님, 이 정도는 업무 지시 아닌가요?”

신입사원 김 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매일 밤 11시까지 야근을 시키고, 주말에도 카톡으로 업무 지시를 하는 팀장.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과 함께 개인 심부름까지 시키는 상황. 이건 열정적인 지도일까, 아니면 괴롭힘일까?

2019년 7월,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직장인들이 “이 정도는 참아야 하는 거 아닌가"라며 괴롭힘과 정당한 업무 지시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73.3%가 괴롭힘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정작 신고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법은 어떻게 정의하는가

근로기준법 제76조의2는 직장 내 괴롭힘을 명확히 정의한다: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

이 세 가지 요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된다. 하나씩 살펴보자.

직장 내 괴롭힘 3가지 판단 기준

1. 지위 또는 관계의 우위

단순히 상사와 부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 지위의 우위: 직급상 상위자 (팀장→대리)
  • 관계의 우위:
    • 인원수의 우위 (팀원 5명이 한 명을 집단으로 따돌림)
    • 근속연수, 연령, 학벌에 따른 영향력
    • 업무상 필수적인 정보나 권한을 가진 경우

실제 사례: 같은 대리급이지만 오래 근무한 A가 신규 입사자 B에게 “여기 문화도 모르면서"라며 회식에서 배제하고 업무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경우, 근속연수에 따른 관계의 우위를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는 행위

정당한 업무 지시와 괴롭힘의 핵심적 구분점이다: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는 경우:

  • 업무상 필요성이 없는 행위
  • 행위 양태가 사회 통념상 상당하지 않은 경우

구체적 예시:

상황정당한 지시괴롭힘
업무 미숙에 대한 지적“이 부분 수정이 필요해요. 다음엔 이렇게 해보세요”“이것도 못해? 대학은 어디 나왔어?” (인격 모독)
야근 요청긴급한 프로젝트 마감을 위한 일시적 야근 요청매일 습관적으로 밤 11시까지 사무실에 있을 것을 요구
업무 배분능력에 따른 적절한 업무 분담특정인에게만 과도한 업무 집중, 또는 아예 업무 배제

최근 판례: 한 제조업체에서 팀장이 부하직원의 업무 실수에 대해 “이 멍청한 XX가” 등의 욕설을 일상적으로 사용한 사례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되었다. 업무상 지적은 필요했으나, 인격을 모독하는 방식은 적정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판단됐다.

3. 신체적·정신적 고통 또는 근무환경 악화

반드시 심각한 우울증이나 트라우마까지 갈 필요는 없다. **“능력을 발휘하는 데 지장이 생길 정도”**면 충분하다.

근무환경 악화의 예:

  • 업무에 필요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공유하지 않아 실수를 유발
  • 회의에서 의견을 무시하거나 비웃어 발언을 주저하게 만듦
  • 단체 메신저에서 배제하여 업무 소통에 어려움 발생

이것도 괴롭힘일까? 현실 사례

사례 1: 점심시간의 압박

상황: 팀장이 매일 점심시간에 “점심 먹었으면 빨리 들어와"라고 카톡을 보낸다. 실제로 1시까지는 점심시간이지만 팀원들은 12시 40분이면 복귀한다.

판단: 명시적인 업무 지시는 아니지만, 지위를 이용해 정해진 휴식시간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근무환경 악화에 해당할 수 있다.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경우 괴롭힘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사례 2: 퇴근 후 메신저

상황: 임원이 밤 11시에 “내일 아침까지 보고서 요약본 보내줘"라고 메시지를 보낸다.

판단:

  • 일회성이고 긴급한 사안: 업무상 필요성이 인정될 수 있음
  • 반복적이고 습관적: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는 것으로, 근로자의 휴식권을 침해하는 괴롭힘 소지

사례 3: 집단 따돌림

상황: 부서 회식에 특정 팀원만 초대하지 않고, 업무 관련 단톡방에서도 제외한다. “성격이 안 맞아서"라고 한다.

판단: 명백한 직장 내 괴롭힘이다. 업무상 필요한 정보 공유를 막아 근무환경을 악화시키고, 인원수의 우위를 이용한 관계적 괴롭힘에 해당한다.

사례 4: 육아휴직 복귀자 차별

상황: 육아휴직 후 복귀한 직원에게 “애 키우느라 바쁜데 힘든 일 시키면 안 되지"라며 단순 업무만 배정하고, 중요 회의에서 배제한다.

판단: 배려의 탈을 쓴 차별이다.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업무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근무환경 악화이며, 경력 단절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괴롭힘이다.

피해를 당했다면

1단계: 기록하라

  •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
  • 카톡, 이메일, 녹취 등 증거 확보
  • 목격자 진술 확보

2단계: 회사에 신고하라

근로기준법 제76조의3에 따르면:

  • 누구든지 회사에 신고할 수 있다 (피해자가 아니어도 가능)
  • 회사는 객관적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 조사 중 피해자 보호 조치를 해야 한다

회사가 해야 할 일:

  1. 지체 없이 객관적 조사 실시 (위반 시 500만원 이하 과태료)
  2. 피해자 보호 조치 (근무장소 변경, 유급휴가 등)
  3. 괴롭힘 확인 시 가해자 징계
  4. 신고자에 대한 불리한 처우 금지 (위반 시 3년 이하 징역)

3단계: 외부 기관 활용

회사가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 고용노동부 고객상담센터: ☎ 1350
  • 관할 지방고용노동관서: 직접 신고 가능
  • 직업트라우마센터: ☎ 1588-6497 (심리상담)

기업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취업규칙 필수 규정

상시 10명 이상 사업장은 취업규칙에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 직장 내 괴롭힘 행위의 정의
  • 금지되는 구체적 행위 유형
  • 신고·조사 절차
  • 피해자 보호 및 가해자 징계 기준

예방이 최선이다

효과적인 예방 활동:

  1. 최고경영자의 의지 표명 및 선언
  2. 정기적인 예방교육 실시
  3. 익명 신고 채널 구축
  4. 조직문화 진단 및 개선

한 IT기업은 분기마다 익명 조직문화 설문을 실시하고, 특정 팀에서 문제 징후가 포착되면 선제적으로 개입한다. 이를 통해 실제 신고 건수는 줄었지만, 직원 만족도는 크게 상승했다.

마치며: 경계에서 망설이지 말라

“이 정도면 참아야 하나?” 이 질문 자체가 이미 문제의 신호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제도는 단순히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상호 존중의 직장문화를 만들기 위한 출발점이다.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고, 기업이 책임 있게 대응하고, 동료들이 연대할 때, 비로소 건강한 조직이 만들어진다.

망설이지 말고 말하자. 당신의 존엄은 협상 대상이 아니다.


참고자료

  • 고용노동부, “직장 내 괴롭힘 예방·대응 매뉴얼” (2023)
  • 근로기준법 제76조의2, 제76조의3
  • 국가인권위원회,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 (2017)